| [people475 칼럼] 2001년 6월 1일 | ||||
|
88년 한겨레 신문이 창간되었을 때, 군사정권 아래서 반정부적인 논조를 가진 신문의 탄생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 사이에 화제가 되었었다. 그렇지만 내 눈에 관심을 불러 일으킨 것은 논조보다는 가로쓰기에 한글전용이라는 외형적 특징이었다. 일출과 일몰을 해돋이와 해넘이로 표현한 일기예보 기사는 회사원이던 나에게 무척 참신하게 다가왔던 것이 사실이다. 보수적인 신문이라는 매체에 가로쓰기라는 혁신은 한겨레신문이 기존의 신문시장을 개혁해 내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으로 보였다. 또한, 한글전용은 한편으로 민중 지향적 성격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백두산 그림을 배경으로 한 제호와 함께 강한 민족주의 성향을 신문 전면에 걸쳐 웅변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보는 사람의 시각이 보수적이건 진보적이건 간에 우리 신문시장에서 한겨레신문의 대칭점에 존재하는 신문이 조선일보라는 것에 대해서 이의를 가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지금 이야기한 가로쓰기와 한글전용에 있어서도 조선일보는 한겨레신문과 정반대의 대칭점에 정확히 존재하고 있다. 수많은 신문들이 한겨레를 따라서 신문의 형태를 가로쓰기로 바꾸어 나갈 때, 마지막까지 세로쓰기를 고수한 신문이 바로 조선일보였다. 결국에는 시대변화의 흐름을 거부하지 못해 가로쓰기로 바꾸기는 했지만, 조선일보는 세로쓰기 편집을 가로쓰기로 바꾸면서 신문 가로쓰기의 효시는 바로 조선일보였다는 식의 기사를 내보내 보는 이로 하여금 실소를 자아내게 하는 서비스도 잊지 않고 해주었다. 조선일보가 한자에 보내는 애정은 과히 자식에 대한 사랑과도 비길 만 하다. 젊은이들 사이에 조선일보의 가독성을 떨어뜨리는 원인이 바로 과다한 한자의 사용이며, 많은 젊은이들의 선망(?)의 대상인 조선일보사 기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 어려운 한자 시험을 통과해야만 한다. 한겨레신문의 한글전용이 민족주의의 상징이라면 (구체적으로는 통일이 되겠지만), 대칭점에 있는 조선일보의 한문사랑을 반민족 (or 반통일)의 혐의로 보면 어떨까? 외국에서는 민족주의라는 말과 극우라는 말이 동시에 쓰이는 것을 심심치 않게 자주 접할 수가 있다. "극우민족주의"는 많이 들어봤어도, "극좌민족주의"라는 말은 별로 못 들어 봤을 것이다. 나치즘으로 대표되는 유럽의 극우주의자들이 순수한 게르만족의 혈통을 강조하며 유색인종에 대한 배타성을 드러내는 것은 너무나도 유명한 사실이며, 멀리 갈 것 없이 이웃 일본만 하더라도 극우주의자들이 신사참배를 하며 일본 민족에 대한 우월성을 강조하는 것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우리나라에서는 "극우민족주의"라는 말을 너무 듣기가 힘들다. 외국에서는 그렇게 잘 어울리는 "극우"와 "민족주의"가 우리나라에서는 마치 아귀가 맞지 않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몇 년 전, 김영삼이 옛 조선총독부 건물을 헐어버리라는 지시를 내린 적이 있다. 이 때 가장 반대를 하고 나선 신문이 바로 조선일보였다. 이미 역사화 된 유물에 대한 파괴작업을 달가와 하지 않는 나로서도 김영삼의 무식하면서 저돌적인 조선총독부 해체를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일제시대의 향수를 그리워하는 듯한 조선일보의 반대가 곱게 보이지는 않았다. 어쩌면 조국근대화의 영웅이라며 떠받드는 박정희에 대한 조선일보의 향수는 70년대 이후 산업발전의 공로에 대한 것이 아니고, 일제시대 독립군 토벌에 앞장섰던 일본군 장교 경력에 대한 것이 아닌지 심히 의심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조선일보의 이러한 성향은 멀리 통일신라시대로 까지 올라간다. 몇 년 전 월간조선의 기사에서는 발해에 대해 우리 민족의 국가가 아니라는 식의 기사를 실으면서 발해를 우리 민족사에 편입시키는 것을 무슨 음모가 있는 식의 논지를 펼쳤다. 역사학자들이 사대주의 사관으로 인하여 예리한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대하여 아주 훌륭한 역사책이라고 적극 옹호를 하기도 했다. 심지어 발해의 유물을 통해서는 우리 민족이라는 느낌을 받지 못한다는 망발에 가까운 표현까지 서슴지 않았다. 민족을 생각하는 사람치고 유치한 역사인식일 망정 고구려가 아닌 신라가 삼국통일한 것을 아쉬워하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조선일보는 이러한 상식에서 비껴나가도 한참을 비껴나가고 있었다. 국사 교과서가 통일신라와 발해의 시대를 남북국 시대로 표현하는 것을 두고 북한의 역사학계를 따라가는 것이라고 색깔 공세까지 해대는 조선일보를 보노라면 우리나라에서 극우와 민족주의가 공존하지 못하는 현실의 일단을 보는 느낌이다. 누가 뭐라 해도 극우와 민족주의가 공존하지 못하는 우리의 사회현실은 우리나라의 극우파가 친일파의 뿌리로부터 파생된 세력이란 데서 기인하는 것이다. 조선일보로 대표되는 극우파가 외국의 극우처럼 민족주의를 전면에 내세우지 못하는 이면에는 친일에서 오는 컴플렉스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조선일보는 외국에서 극우이데올로기와 함께 전 국민을 마약과 같이 홀려서 한데 묶는 역할을 하는 민족주의의 자리를 대신하여 바로 반공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내세우고 있다. 이 같은 사실은 38선을 베고 죽을지언정 민족의 분단은 막아야겠다고 민족주의의 기치를 높이 들었던 김구 선생을 단정을 추진한 이승만보다 낮게 깔아보는 조선일보의 논조를 통해 확인이 되고 있다. 어쩌면 민족국가의 전통이 오래된 우리 나라에서 민족주의라는 강력한 이데올로기가 극우주의자들에게 쓰이지 못하는 현실이 한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반민족이라는 삼척동자가 보아도 명백한 죄악상을 두고도 반공이라는 미명 하에 용서가 되는 우리의 왜곡된 역사에 안타까운 마음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그리고 미국이나 유럽에서 민족주의 혹은 백인 우월주의를 내세움에도 불구하고 극소수의 지위에 머물고 있는 극우세력의 위상과 비교하여, 반민족행위라는 분명한 죄악상을 무릅쓰고 메인 스트림의 위상을 다지고 있는 우리나라의 조선일보와 같은 극우세력의 거대한 위상은 역사에 대한 불신감마저 자아내게 하고 있다. 안티조선운동의 선구자 강준만의 말대로 조선일보는 너무나 과한 지분을 한국사회에서 차지하고 있다. 내 생각에 조선일보는 독일의 극우세력만큼의 지분도 너무 과하다. 독일의 극우에게는 없는 반민족이라는 죄악마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독립운동가를 때려잡던 친일파를 대통령으로 모실 수 있어도 독립운동의 한 방법으로 좌익을 선택했던 독립운동가는 때려잡아야 한다는 아주 극히 반민족적인 가치관이 우리의 뇌리에 팽배해지게 한 장본인은 다름 아닌, 친일의 컴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민족주의 대신에 반공을 내세웠던 극우세력이라 할 수 있으며, 그 대표 자리에 조선일보가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그렇지 않은가? 황국신민의 위대한 영광을 위하여 가미가제 특공대를 모집하던 조선일보가, 종군위안부 모집에 앞장섰던 조선일보가, 위대한 천황 히로히또의 장수무강을 기원하던 조선일보가, 해방된 조국에서 1등 신문의 위치를 점하고 있는 사실을 두고 누가 대한민국이 제대로 된, 역사가 바로 선 나라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그리고 자라나는 새싹들에게는 뭐라고 교육할 것인가? 민족을 팔아먹고, 애국자들을 때려잡아도 적당히 처세만 잘하고 반공만 외치면 메인스트림으로 잘 살아갈 수 있다는 왜곡된 가치관을 자손 만대에 길이길이 가르칠 것인가? 아니면 조국과 민족을 사랑해도 조국과 민족은 후대에도 그 충정을 알아주지 않을 것이니 애국 애족을 할 려면 정말 봉사하는 마음으로 하라고 공자님 말씀을 늘어놓을 것인가? 같은 식칼이라 하더라도 요리사에게는 훌륭한 음식을 만드는 도구가 되지만, 살인자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흉기가 되는 것이다. 보수이데올로기는 조선일보에게 주어져서는 절대 안될 도구이다. 조선일보를 자유나 민주, 보수의 관념으로 재단하는 것은 그들에게 너무나 과분한 노릇이다. 그런 것은 기본을 갖춘 자에게나 보낼 수 있는 잣대이지, 반민족 부역자를 평가하기에는 너무나 고상한 잣대인 것이다. 조선일보의 친일 컴플렉스는 다른 안티조선운동의 모든 논리에 대해서는 반박을 하면서도 친일행위에 대해서만은 침묵을 일관하는 그들의 태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나는 조선일보가 독재정권과 유착했느니 언론에 본분을 지키지 못했느니 하는 비판은 별로 하고 싶지가 않다. 기본도 안되어 있는 것들에 대해 너무 고상한 것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조선일보는 기본이 안되어 있는 신문이다. 조선일보가 판매율 1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현실은 우리 사회에서 결과만 좋으면 수단 방법은 가리지 않는 우리의 왜곡된 가치관을 여실히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이다. 조선일보를 반대하는 것은 거창한 민주주의나 언론개혁운동이 아니다. 최소한의 양식과 기본을 회복하자는 아주 소박한, 정말 소박한 사회적 요구인 셈이다. 나는 조선일보가 이 땅에서 하루빨리 없어지기를 소망한다. | ||||
rhw12@samsung.co.kr |